[내일의 제1독서 말씀] 고통 너머에 준비된 자리(요한묵시록 11,19 ; 12,1-6.10)
제임스
2026-08-14 2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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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아이를 낳아 본 어머니들은 출산의 고통을 쉽게 잊지 못한다고 한다.
오랜 시간 진통을 겪으며 견디기 어려운 순간을 지나지만,
마침내 아이의 울음소리를 듣는 순간 그 고통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고통이 사라져서가 아니다.
그 고통을 지나 새로운 생명이 태어났기 때문이다.
오늘 요한 묵시록에는 한 여인이 등장한다.
“태양을 입고 발밑에 달을 두고 머리에 열두 개 별로 된 관을 쓴 여인”이다.
그러나 그토록 영광스러운 모습의 여인도
해산의 진통과 괴로움으로 울부짖고 있다.
해산의 진통과 괴로움으로 울부짖고 있다.
빛나는 여인과 고통받는 여인.
서로 어울리지 않는 모습 같지만 우리의 삶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신앙을 가지고 산다고 해서 고통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열심히 기도해도 병이 찾아오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하며,
뜻하지 않은 실패와 어려움을 만난다.
때로는 “하느님께서 계신다면 왜 이런 일이 생기는가?”라는 질문도 하게 된다.
오늘 말씀은 고통이 없을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여인이 가장 힘겨운 순간을 통과하고 있을 때 붉은 용까지 나타난다.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삼켜 버리려고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용이 모든 것을 삼키지는 못한다.
아이는 하느님께로 들어 올려지고 여인은 광야로 피신한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광야에는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신 처소”가 있었다.
나는 이 구절이 참 좋다.
광야에도 하느님께서 마련해 놓으신 자리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광야는 가능하면 피하고 싶은 곳이다.
건강을 잃었을 때, 가까운 사람을 떠나보냈을 때,
자녀의 문제로 마음 아플 때, 오랫동안 준비한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우리는 인생의 광야에 서 있다고 느낀다.
그때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 뒤돌아보면 뜻밖의 사람을 만나 도움을 받았고,
누군가의 따뜻한 말 한마디가 힘이 되었으며,
어려움 때문에 오히려 삶에서 무엇이 중요한지를 깨닫게 된 경우가 있다.
광야가 없어지지는 않았지만
그 안에 이미 마련되어 있던 작은 쉼터를 발견한 것이다.
성모님의 삶도 그러했다.
하느님의 아들을 품었다고 해서 편안한 길만 걸으신 것은 아니다.
아들을 낳을 방을 찾지 못했고,
어린 예수님을 데리고 피신해야 했으며,
마침내 십자가 아래에서 아들의 죽음까지 바라보아야 했다.
그러나 성모님은 이해할 수 없는 순간에도 하느님을 떠나지 않으셨다.
오늘 말씀의 마지막에는 마침내 이런 선언이 울려 퍼진다.
“이제 우리 하느님의 구원과 권능과 나라와
그분께서 세우신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났다.”
붉은 용의 위협이 마지막 장면이 아니었다.
마지막 장면은 구원이었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눈앞의 한 장면만 보고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그러나 한 페이지가 힘들다고 해서 책 전체가 슬픈 이야기가 되는 것은 아니다.
신앙은 지금의 고통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장면이 마지막 장면은 아니라는 것을 믿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늘 성모님의 모습을 바라보며 나 자신에게 묻는다.
나는 광야를 만났을 때 무엇만 바라보고 있는가.
나를 위협하는 붉은 용만 바라보고 있는가,
아니면 그 광야 어딘가에 하느님께서 마련해 두신 자리를 찾고 있는가.
우리의 삶에도 진통이 있고 광야가 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새로운 생명은 태어나고,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자리는 존재한다.
그러므로 오늘의 어려움만으로 내 인생의 결론을 미리 쓰지 말아야겠다.
내가 아직 마지막 장면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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