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성경 말씀] 눈물을 닦아 주시는 하느님 ― 상처와 은총, 그리고 빵 한 조각의 기적
제임스
2025-12-03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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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어느 날 성경을 펼쳤을 때, 이사야 예언서의 한 구절이 가만히 가슴 깊은 곳을 건드렸다.
“주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내시고 당신 백성의 수치를 온 세상에서 치워 주시리라.”
눈물을 닦아 주신다—
얼마나 조용하고도 친밀한 표현인가. 그것은 단순히 위로의 말이 아니라, 슬픔의 흔적에 직접 손을 대신다는 약속이다. 마치 엄마가 아이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쓰다듬어 주듯, 사랑이 가장 가까운 방식으로 닿는 순간이다.
얼마나 조용하고도 친밀한 표현인가. 그것은 단순히 위로의 말이 아니라, 슬픔의 흔적에 직접 손을 대신다는 약속이다. 마치 엄마가 아이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쓰다듬어 주듯, 사랑이 가장 가까운 방식으로 닿는 순간이다.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눈물을 흘린다.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못한 아픈 상처들,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았던 눈부신 슬픔들, 안에서만 조용히 무너져 내리던 밤들이 있다. 떨리는 손으로 눈물을 훔쳐본 사람은 안다.
눈가는 닦여도 마음은 좀처럼 마르지 않는다는 것을.
눈가는 닦여도 마음은 좀처럼 마르지 않는다는 것을.
그런데 이사야는 말한다. 하느님께서 눈물을 닦아 주신다고.
우리의 손이 아닌, 다른 사람의 위로가 아닌,
그분의 손이 직접 이 얼마나 놀라운 약속인가.
그분의 손이 직접 이 얼마나 놀라운 약속인가.
그 약속은 세월을 건너 예수님의 손길로 이어졌다.
갈릴래아의 평범한 하루, 병자와 절름발이와 보지 못하는 이들이 서로를 부축하며 예수님께 나왔다.
복음은 이렇게 말한다.
“그들을 그분 발치에 데려다 놓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고쳐 주셨다.”
복음은 이렇게 말한다.
“그들을 그분 발치에 데려다 놓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고쳐 주셨다.”
예수님의 치유는 언제나 조용했다.
소리치지 않았고,
과장된 움직임도 없었고,
기적을 드러내려는 과시도 없었다.
다만 그분의 눈빛과 손길은 이사야가 말한 그 약속—
‘눈물을 닦아 주시는 하느님’의 얼굴이었다.
소리치지 않았고,
과장된 움직임도 없었고,
기적을 드러내려는 과시도 없었다.
다만 그분의 눈빛과 손길은 이사야가 말한 그 약속—
‘눈물을 닦아 주시는 하느님’의 얼굴이었다.
누군가는 오래된 병에서 풀려났고,
누군가는 평생 가슴에 담아 두었던 상처에서 놓여 났으며,
누군가는 사랑 받지 못해 웅크렸던 마음을 그 한순간에 녹여냈다.
누군가는 평생 가슴에 담아 두었던 상처에서 놓여 났으며,
누군가는 사랑 받지 못해 웅크렸던 마음을 그 한순간에 녹여냈다.
그것은 몸의 치유이기도 했지만, 아마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의 눈물을 닦아내는 치유였을 것이다.
그런데 복음은 또 다른 장면을 이어 보여준다.
이번에는 아픈 이들이 아니라 굶주린 이들에게 다가가시는 예수님을 묘사한다.
사람들은 며칠째 먹지도 못하고 광야에서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지쳐 있었다.
예수님은 그들을 보시며 안쓰러워하셨다.
“그들이 굶주려 집에 돌아가다가 쓰러질까 두렵다.”
그런데 복음은 또 다른 장면을 이어 보여준다.
이번에는 아픈 이들이 아니라 굶주린 이들에게 다가가시는 예수님을 묘사한다.
사람들은 며칠째 먹지도 못하고 광야에서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지쳐 있었다.
예수님은 그들을 보시며 안쓰러워하셨다.
“그들이 굶주려 집에 돌아가다가 쓰러질까 두렵다.”
이 말씀은, 단지 배고픔을 채워 주겠다는 뜻이 아니다.
쓰러질까 두렵다―
이것은 염려이고, 보살핌이고, 어떤 부모라도 자식에게 느끼는 가장 깊고 실질적인 사랑의 감정이다.
그렇게 예수님은 빵 일곱 개와 물고기 몇 마리를 들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의 기도를 바치셨다.
그리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은 그것을 군중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부르게 먹었다.
이 장면은 유월절의 ‘빵과 양의 피’처럼 거창한 상징은 아니지만
실은 그와 같은 신학적 깊이를 지닌다.
하느님은 우리의 눈물뿐 아니라
허기와 외로움, 피로와 두려움까지도 닦아주시는 분이다.
쓰러질까 두렵다―
이것은 염려이고, 보살핌이고, 어떤 부모라도 자식에게 느끼는 가장 깊고 실질적인 사랑의 감정이다.
그렇게 예수님은 빵 일곱 개와 물고기 몇 마리를 들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의 기도를 바치셨다.
그리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은 그것을 군중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부르게 먹었다.
이 장면은 유월절의 ‘빵과 양의 피’처럼 거창한 상징은 아니지만
실은 그와 같은 신학적 깊이를 지닌다.
하느님은 우리의 눈물뿐 아니라
허기와 외로움, 피로와 두려움까지도 닦아주시는 분이다.
눈물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상실의 눈물, 아픔의 눈물, 억울함의 눈물, 그리고 아무 이유 없이 흘러내리는 삶의 눈물들.
그러나 굶주림에도 눈물이 있다.
사람이 버려졌다고 느낄 때, 누군가 나를 돌보지 않는다고 느낄 때 흘리는 눈물도 있다.
상실의 눈물, 아픔의 눈물, 억울함의 눈물, 그리고 아무 이유 없이 흘러내리는 삶의 눈물들.
그러나 굶주림에도 눈물이 있다.
사람이 버려졌다고 느낄 때, 누군가 나를 돌보지 않는다고 느낄 때 흘리는 눈물도 있다.
예수님은 바로 이 눈물을 보셨다. 그리고 빵을 떼어 나누셨다.
마치 하느님께서 사람의 얼굴을 닦아 주는 손길이 그대로 육화된 것처럼.
마치 하느님께서 사람의 얼굴을 닦아 주는 손길이 그대로 육화된 것처럼.
때때로 우리는 하느님이 멀리 계시다고 느낀다.
기도를 들어주지 않는 것 같아 실망하기도 한다.
하지만 복음의 장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하느님은 언제나 가장 현실적인 문제부터 해결해 주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도를 들어주지 않는 것 같아 실망하기도 한다.
하지만 복음의 장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하느님은 언제나 가장 현실적인 문제부터 해결해 주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먼저 몸의 고통을 고쳐주시고, 다음으로 허기를 채워주시며,
그러고 나서 마음의 눈물을 닦아 주신다.
그러고 나서 마음의 눈물을 닦아 주신다.
그 손길은 때때로 치료였고, 어떤 날에는 위로였으며,
또 다른 날에는 빵 한 조각의 배부름이었다. 그러나 그 모두는 본질적으로 같은 의미였다.
또 다른 날에는 빵 한 조각의 배부름이었다. 그러나 그 모두는 본질적으로 같은 의미였다.
“나는 너와 함께 있다.”
어쩌면 우리가 흘리는 모든 눈물 가운데 하느님께서 가장 먼저 닦아 주고 싶어하시는 것은
이름조차 붙이기 어려운, 설명할 수도 없는, 마음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눈물인지도 모른다.
이름조차 붙이기 어려운, 설명할 수도 없는, 마음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눈물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 눈물을 잘 감추고 살지만 하느님은 그것을 안다. 그래서 예언자는 확신에 차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이분께 희망을 걸었고, 이분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
“우리는 이분께 희망을 걸었고, 이분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
구원은 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눈물 한 방울을 닦아 주는 순간,
굶주린 마음이 배부름을 얻는 순간,
세상이 두렵지 않게 되어 다시 일어서는 그 순간이 바로 구원의 시작이다.
굶주린 마음이 배부름을 얻는 순간,
세상이 두렵지 않게 되어 다시 일어서는 그 순간이 바로 구원의 시작이다.
하느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가까이 계신다.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우리의 삶 한가운데에서 끊임없이 손을 내밀고 계신다.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우리의 삶 한가운데에서 끊임없이 손을 내밀고 계신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한 손에는 삶의 무게를 들고, 다른 손에는 작은 희망 하나를 움켜쥔 채
이사야의 말을 천천히 되새겨 본다.
이사야의 말을 천천히 되새겨 본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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