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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과 일어섬

제임스
2025-10-12 08:26 31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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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하늘은 높고, 바람은 깊은 향기를 품고 있다.
낙엽이 바스락거리며 떨어지는 소리에도 마음이 숙연해진다.
그래서일까, 요즘은 문득문득 과거를 회상하며 추억에 젖곤 한다.

그럴 때면 오래전 들었던 말씀이 마음을 두드린다.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십시오.”(2티모 2,8.11)
단순한 한 문장 같지만, 그 안에는 삶 전체를 흔드는 힘이 숨어 있다.

그분을 기억한다는 것은 단지 성경 속 이야기나 기적을 떠올리는 일이 아니다.

오늘의 내 삶을 그분의 숨결 안에 두는 일이며,
매 순간 그분의 시선으로 세상을 다시 바라보는 일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다는 것은 내 안의 교만과 욕심, 두려움을 내려놓는 것이다.
내 안의 를 비워낼 때, 텅 빈 그 자리에 비로소 새로운 생명이 들어온다.
바오로 사도는 이 죽음을 두려움으로 보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을 통해 진정한 생명, 부활의 기쁨이 시작된다고 믿었다.

 

우리도 때로는 작은 죽음을 겪는다.
오랫동안 준비해 온 계획이 무너질 때,
아끼던 사랑이 상처로 바뀔 때,
건강과 젊음이 서서히 멀어질 때.
그러나 그 모든 순간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살아남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죽음은 닫힘이 아니라, 그분과 함께 다시 일어서기 위한 문이다.

 

루카 복음의 나병환자 이야기는 그런 일어섬의 순간을 잘 보여준다.
열 명이 치유를 받았지만, 단 한 명만이 예수께 돌아와 감사를 드렸다.
예수님은 그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7,19)

이 말씀은 단순한 육체의 치유를 넘어, 삶의 방향을 바꾸는 초대였다.
병이 낫는 것이 구원의 전부가 아니었다.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을 통해 그는 구원의 문턱을 넘었다.
그 순간 그의 인생은 과거의 질병과 절망에서 벗어나,
새로운 길로 나아가게 되었다.
그때 감사는 곧 믿음의 다른 이름이었다.

 

나 역시 내 인생의 여러 장면 속에서 이 말씀을 떠올린다.
삶이 무너지는 듯한 고통 속에서도
누군가의 따뜻한 위로 한마디에 다시 일어설 힘을 얻었던 순간들처럼.
그 모든 순간이 결국은 하느님께 돌아가는 길이었다는 것을
시간이 지나서야 깨닫는다.

믿음은 그렇게 우리를 다시 걷게 하고,
감사는 그렇게 우리를 다시 살아 있게 만든다.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이 말은 생활 속에서 마음의 중심을 다시 세우라는 부르심이다.
세상의 소음과 혼란 속에서도
그분의 온유함과 진실을 기억하는 일,
그리고 그 기억이 나를 다시 일어서게만드는 것.

이것이 믿음의 여정이다.

 

삶은 넘어지고 일어나는 연속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분을 기억할 때,
쓰러짐은 더 이상 실패가 아니다.
그것은 다시 일어서기 위한 준비일 뿐이다.

그분과 함께 죽고, 그분과 함께 사는 것
그것이 신앙의 신비이며,
인간이 걸어가는 가장 아름다운 길이다.

 

오늘도 나는 그분을 기억하려 한다.
그리고 그 기억 속에서 다시 일어서려 한다.
바람이 흔들어도 꺾이지 않는 갈대처럼,
믿음이 내 영혼을 곧게 세워 주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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