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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묘와 순교자의 묘 앞에서

제임스
2025-10-03 15:08 72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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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장흥에 있는 길음동 성당 묘지공원을 다녀왔다. 그곳에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납골묘가 있다. 가을비가 살포시 내려 망설였지만, 준비해 간 음식을 펴 상을 차렸다. 그러나 연도를 바치려는 순간, 빗줄기가 갑자기 굵어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서둘러 우산으로 음식을 가리고, 다시 함에 차곡차곡 담았다. 빗속에서 짧게 주모경을 바친 뒤, 아쉬운 마음으로 자리를 정리했다. 어제 저녁에 연미사를 봉헌한 것이 그래도 위로가 되었다.

    주차장에 와서 차에 걸터앉았다. 차려온 음식을 펼쳐 놓고, 자동차에서 흘러나오는 예수는 나의 기쁨을 들으며 먹었다. 젖은 바람 사이로 전해지는 음식 맛은 이상하게도 더 짙고 따뜻하게 느껴졌다. 묘역을 오가는 몇몇 성묘객들도 보였으나, 대부분은 간단히 기도만 드리고 바로 떠났다. 음식상을 차려 놓고 긴 시간을 머무는 풍경은 오늘은 드문 듯하다이 묘역에는 특별한 무덤 하나가 있다. 바로 순교자 성 요한 남종삼의 묘다. 그래서 이곳을 찾을 때면 단순히 성묘가 아니라 성지순례를 하는 기분이 든다.

     남종삼은 충청도 홍주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 분은 특별한 자리에 있던 분이 아니었다. 농사를 짓고 가족을 돌보는 평범한 백성이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는 세상 어떤 빛보다 더 단단한 믿음이 있었다. 하느님을 향한 굳건한 신앙이었다.


    조선 후기, 신앙을 지킨다는 것은 곧 목숨을 내놓는 일이었다. 가톨릭은 서학이라 불리며 박해의 대상이 되었고, 신앙인들은 늘 위험 속에 살았다. 그러나 남종삼은 눈에 보이는 권력보다 보이지 않는 하늘의 권세를 더 크게 두려워했다. 그는 신앙을 숨기지 않았고, 공동체를 돌보며 그 길을 굳세게 걸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났을 때, 그는 붙잡혀 끌려갔다. 신문관은 이렇게 회유했다.

신앙을 버리면 살려주겠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단호했다.

나는 하느님의 종으로, 결코 신앙을 버릴 수 없다.”

혹독한 고문이 이어졌다. 쇠몽둥이가 그의 몸을 짓밟고, 매질은 끝없이 가해졌다. 하지만 그는 끝내 굽히지 않았다. 그것은 단순한 고집이 아니라, 죽음을 넘어서는 생명에 대한 확신이었다. 곧 하느님 나라에 대한 굳은 신뢰였다.

    186637, 서소문 밖 형장. 이미 많은 순교자들의 피가 스며든 자리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기도했다.

주여, 저를 받아 주소서. 저의 생명은 당신 것입니다.”

칼이 그의 목을 스쳤고, 그의 나이 마흔아홉. 육신은 땅에 묻혔지만, 영혼은 하늘로 올려졌다.

    남종삼 성인의 이야기는 단순히 역사 속 사건이 아니다. 오히려 오늘 우리에게 더 깊은 울림을 남긴다. 우리는 칼날 앞에 선 순교의 시대에 살지는 않는다. 그러나 믿음을 타협하라는 유혹은 여전히 우리 곁에 있다.

세상의 성공, 사람들의 인정, 물질적 풍요는 때때로 작은 신이 되어 우리를 흔든다. 겉으로는 신앙을 고백하면서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다른 우상을 따르고 있지는 않은가. 성인은 우리에게 묻는다.

너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느냐?”

믿음을 지키기 위해 무엇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느냐?”

세상이 내미는 달콤한 손길 앞에서, 너는 어디에 서 있겠느냐?”

그의 대답은 분명했다. 목숨은 잃을지라도 하느님을 잃을 수는 없다는 것. 그러나 우리의 대답은 아직도 분명하지 못한 듯하다.

 

     1925, 교황 비오 11세는 그를 시복했고,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한국을 직접 방문해 그와 103위 순교자를 성인품에 올렸다. 여의도 광장은 눈물과 환호로 가득 찼다. 그것은 과거의 사건을 기념하는 자리가 아니라, 순교자들의 증거가 오늘의 우리에게 살아 있는 길잡이임을 확인하는 자리였다.

    남종삼 성인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믿음은 말로만 하는 고백이 아니라, 삶으로 드러내는 증거다. 생명을 내어놓는 자리에서도 하느님을 택할 수 있는 용기, 그것이 참된 신앙이다.”

우리는 날마다 작은 선택의 순간에서 작은 순교를 살아야 한다.

편안함 대신 진실을 택할 때,

이익 대신 정의를 택할 때,

나를 드러내는 대신 하느님을 드러낼 때,

우리는 성인의 발자취를 따르고 있는 것이다.

오늘, 아버지 어머니 묘소를 다녀오며 빗속에서 드린 짧은 주모경이 유난히 깊게 남는다. 그 자리에서 이렇게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주님, 성 요한 남종삼처럼, 저희도 작은 순간마다 당신을 선택하게 하소서. 세상의 유혹 앞에서 굽히지 않게 하시고, 신앙의 길에서 끝까지 당신을 따라 걷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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