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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티 성지를 찾아서

제임스
2025-07-12 08:42 12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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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 골짜기에서 피어난 믿음 — 배티 성지를 찾아서


한여름의 열기가 짙게 깔린 날이었다.

숨결조차 무거운 그날, 우리는 깊은 산골짜기 하나를 찾았다.

배티 성지.

고개 너머, 세상과 멀어진 그곳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 고요했다.

조선 후기, 제사를 거부했다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은 삶의 터전을 버리고 이곳으로 숨어들었다.

유교 질서의 굳건한 벽을 넘으려 했던 그들은

조용히 그러나 단단하게 공동체를 이뤘다.

성당도, 신학교도 없던 시절.

배티의 작은 움막과 숲 속 공터가 그들의 교리실이었고 제대였으며,

신앙의 성지가 되었다.

아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몰래 미사를 드리고, 고해성사를 이어가며

그들은 시대의 바람 앞에서도 꺼지지 않는 등불이 되었다.

그 속에서 김대건 안드레아와 최양업 토마스,

훗날 한국 천주교회의 초석이 될 두 사제가 첫 신학 공부를 시작했다.

배티는 그저 숨기 위한 골짜기가 아니었다.

성직자 양성이라는 희망의 씨앗이 뿌려진, 조선 교회 성장의 출발점이었다.

성지 한켠에는 최양업 신부님 가족의 얼굴상이 있다.

그의 곁에는 성인품에 오른 아버지 최경환 프란치스코와

복자품에 오른 어머니 이성례 마리아가 함께 자리했다.

하지만 정작 최 신부님 자신은 아직도 가경자의 이름으로 머물러 있다.

9만 리, 그 험난한 길을 걸으며 공소를 돌고, 성사를 주고, 복음을 전하던 그의 삶은

순교보다 더 순교적인 것이었다. 

그의 손때 묻은 유품과 조선 땅의 고통을 서양 선교사들에게 전하던 편지들이

박물관 안에 조용히 전시되어 있다.

당시의 순교 장면을 형상화한 조각과 영상은 그날의 숨소리마저 되살려 순례자의 마음을 깊이 흔든다.


성지에서 미사를 드린 후 성물을 축성받으려 신부님을 찾았을 때, 신부님은 정중하게 수령자의 이름을 물으셨다. 

단순한 의식처럼 보일 수도 있었지만, 그분은 그 사람을 위해 진심을 다해 축성해 주셨고,

기도를 바치고, 당사자에게는 머리에 손을 얹어 안수기도까지 해주셨다.

그 정성과 사랑 앞에서 성물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이 담긴 선물이 되어 내 손에 놓였다.

배티를 걷는 발걸음은 무더웠다.

등줄기로 흐르는 땀에 셔츠가 젖었다. 

하지만 그 모든 걸 다 감싸 안고도 내 안에서 차오르는 감사는 더 깊었다.

조상들은 이 무거운 산길을, 믿음을 품고 걸었다.

박해의 그림자 속에서도 그들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나는 생각했다.

지금 내가 걷는 이 길은 얼마나 편안한가.

얼마나 많은 보호 속에 놓여 있는가.

그런 나에게 배티는 말없이 묻는 듯했다.

“너는 무엇을 지키고 있느냐고.”

나는 그 물음 앞에서

작게, 그러나 정직하게

대답할 수 있기를 기도했다.

“주님, 저도… 그 믿음을 따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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