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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의 여정

제임스
2025-10-26 09:00 16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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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성경 말씀(집회 35,21 / 2티모 4,7 / 루카 18,14)에 대한 묵상 수필입니다
 

나이가 들면서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이 있다.
이제는 내가 모든 것을 다 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젊은 시절에는 무엇이든 마음만 먹으면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노력만 있다면 해결하지 못할 일이 없다고 믿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며 깨닫게 되었다.
인간의 한계보다 더 분명히 다가오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의 한계였다.
젊은 연구자들의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예리한 통찰을 평가하며 문득 생각했다.
“아, 이제는 나도 이들과 경쟁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구나.”

그 순간 마음 한쪽에서 ‘겸손’이라는 단어가 새롭게 다가왔다.
젊을 때에는 몰랐던 자리,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는 위치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겸손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겸손은 패배의 표시가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나의 자리를 올바로 아는 지혜였다.


하늘에 닿는 기도는 언제나 조용하다.
국회처럼 소란한 곳에서 외치는 소리보다,
한 사람의 속삭임이 하늘에 더 멀리 닿을 때가 있다.
“겸손한 이의 기도는 구름을 거쳐서 그분께 도달하기까지 위로를 마다하지 않는다.” (집회 35,21)

이 말씀은 마치 안개 낀 새벽,
홀로 무릎을 꿇은 한 사람의 모습을 그리게 한다.
그는 자신의 부족함을 아는 사람이다.
세상의 시선에 자신을 비추어 자랑하지 않고,
오히려 그 한계 속에서 하느님을 찾는다.
그런 마음의 기도는 곧장 하늘로 향한다.

구름을 뚫고 올라간다’는 말은
인간의 연약함과 교만을 넘어 하느님께 나아가는 영혼의 여정을 뜻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인내와 겸손의 숨결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신다.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시간은
버려진 시간이 아니라, 영혼이 단련되는 시간이다.

세상의 빠른 결과와 성취를 향하던 마음을 내려놓고
그저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고백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기도의 시작이자 끝이다.
겸손한 기도는 그 기다림 속에서 더욱 빛난다.


바오로 사도는 생애의 마지막에 이렇게 고백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2티모 4,7)

그의 인생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감옥과 박해, 배신과 가난의 길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순간을 믿음의 싸움으로 받아들였다.
믿음을 지킨다는 것은 단순히 신념을 유지하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께 대한 끝없는 신뢰를 놓지 않는 일이다.

사람들은 그를 미련하다고 여겼지만,
그는 오히려 자신을 낮춤으로써 하느님의 힘을 드러냈다.
그의 완주는 인간 의지의 승리가 아니라 겸손의 결실이었다.
싸움의 끝에서 그는 환호 대신 고요한 평화를 남겼다.
“믿음을 지켰다.”
이 짧은 고백은 신앙인의 삶 전체를 요약한다.
믿음은 소유가 아니라, 끝까지 지켜내야 하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기도 속에서 다져지고, 낮아짐 속에서 완성되는 믿음 —
그것이 바오로의 길이었다.


예수께서는 그 길의 비밀을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루카 18,14)

이 말씀은 기도하는 이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과 같다.
바리사이는 자기 의로움을 자랑하며 하늘을 바라보았고,
세리는 고개를 들지 못한 채 가슴을 치며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라 기도했다.
하느님께서 들어 올리신 이는 세리였다.

겸손은 단순히 자신을 낮추는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자리를 인정하는 신앙의 고백이다.
나의 능력, 나의 공로, 나의 자랑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그분이 내 안의 중심에 오신다.

세상은 높아지기 위해 경쟁하지만,
하느님 나라는 낮아짐을 통해 완성된다.
겸손은 하느님의 손길이 닿을 수 있는 유일한 높이다.
 

겸손한 기도에서 시작된 길은
믿음의 싸움을 지나
결국 낮아짐 속에서 완성된다.

기도는 하늘을 향한 인간의 손이고,
겸손은 그 손을 하느님께 올려드릴 수 있게 하는 힘이다.
바오로처럼 자신의 길을 끝까지 달린 사람은
세상의 박수 대신 하느님의 미소를 얻는다.
그 미소는 보상이라기보다,
함께 걸어온 여정의 사랑스러운 마침표다.

오늘의 우리 또한 이 말씀 속에서
신앙의 순례를 다시 시작할 수 있다.
기도하며, 믿음을 지키며,
낮아짐 속에서 하느님께 다가가는 길.
그 길의 끝에서 하느님께서 조용히 말씀하시리라.

“잘하였다, 충실한 종아.
너는 작지만 겸손한 마음으로 끝까지 나를 믿었구나.”

그때 우리의 기도는 구름을 뚫고,
마침내 하늘에 닿을 것이다.
그리고 하늘은 그 기도를 거울처럼 비추어
다시 우리 마음 안에서 빛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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