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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아담과 이브의 판단하는 신앙과 솔로몬의 듣는 신앙

제임스
2026-02-06 18:16 177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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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판단에 익숙해진다.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틀린지. 누가 맞는지, 누가 잘못했는지.
말씀을 읽고, 세상을 바라보고, 사람을 대할 때조차

우리는 종종 마음속에서 빠르게 선을 긋는다.

그것이 책임감이라고 여기기도 하고, 신앙의 성숙이라고 착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을 조금만 더 천천히 읽어 보면,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가장 경계하신 태도는 의외로 잘못된 선택이 아니라
잘못된 자리였다는 생각이 든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이브가 따 먹은 열매는 흔히 선악을 구별하는 열매로 불린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이렇게 생각한다.
인간은 선과 악을 구별해서는 안 되는 존재인가?
그러나 창세기의 이야기는 인간이 분별 능력을 갖게 된 것을 문제 삼기보다,

그 분별의 기준을 스스로 차지하려 한 태도를 문제 삼고 있다.

너희가 그것을 먹으면 하느님처럼 될 것이다.”
이 말 속에는 유혹의 본질이 담겨 있다.
하느님을 닮으라는 초대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리를 대신하라는 제안이다.

그 순간 인간은 듣는 존재이기를 멈추고, 판단하는 존재가 되었다.
말씀을 기다리기보다 결론을 앞당겼고, 관계 안에서 분별하기보다 독립적인 기준을 세웠다.
그 결과는 지혜가 아니라 두려움이었고, 자유가 아니라 숨음이었다.

 

이 장면을 기억한 채, 우리는 다시 솔로몬의 기도 앞에 선다.

임금이 된 솔로몬에게 하느님은 묻는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이 질문은 권력의 절정에서 던져진 질문이다.
무엇이든 청할 수 있는 자리, 무엇이든 요구할 수 있는 순간이다.
그러나 솔로몬은 강한 손을 구하지 않는다. 앞을 꿰뚫는 전략도, 적을 제압할 힘도 청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을 어린아이라 부른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당신 종에게 듣는 마음을 주십시오.”

솔로몬이 청한 선과 악을 분별하는 마음, 에덴에서 인간이 넘보았던 그 자리와 닮아 보이지만,
방향은 정반대다. 그는 기준이 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기준 앞에 서 있는 존재로 남고자 한다.

히브리어로 듣는 마음레브 쇼메아라 불린다.
이는 판단을 유보하는 무능이 아니라, 판단에 앞서 귀를 여는 용기를 뜻한다.
말씀을 듣고, 사람의 사정을 듣고, 상황의 맥락을 듣는 마음.
혼자 옳아지기보다, 하느님의 뜻 안에서 옳아지고자 하는 태도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이 기도를 기뻐하신다.
솔로몬은 선악을 판단할 권력을 달라고 한 것이 아니라,

선악을 판단해야 할 때조차 하느님을 놓치지 않게 해 달라고 청했기 때문이다.

 

신앙에는 언제나 이 두 길이 공존한다.
판단하는 신앙과 듣는 신앙. 판단하는 신앙은 빠르다.
정답을 가지고 있고, 입장이 분명하며, 흔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 자리에 하느님이 계시지 않을 때, 그 판단은 쉽게 돌이 되고, 칼이 되고, 벽이 된다.

듣는 신앙은 느리다. 말씀 앞에서 머뭇거리고, 사람 앞에서 침묵하며,
쉽게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 느림 속에서 관계는 유지되고, 공동체는 무너지지 않으며,

하느님의 자리는 지켜진다. 성경은 인간에게 판단하지 말라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이렇게 묻는다.

너는 지금 어디에 서서 판단하고 있는가.

솔로몬은 그 자리를 넘보지 않았다. 그는 왕좌 위에 있었지만,
마음만은 여전히 듣는 자리 아래에 두었다.
그래서 그의 지혜는 개인의 영광이 아니라, 백성을 살리는 힘이 될 수 있었다.

오늘을 사는 신앙인에게도 이 기도는 여전히 유효하다.
정답을 더 많이 아는 신앙이 아니라, 말씀을 더 오래 듣는 신앙.
판단으로 앞서가기보다, 경청으로 머무를 줄 아는 신앙.

어쩌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도 묻고 계신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그 질문 앞에서,
우리가 다시 한 번 이렇게 말할 수 있기를 바란다.

주님, 제게 먼저 듣는 마음을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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