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말씀] 익숙함이 신앙을 가릴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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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너무 잘 안다고 생각하는 순간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에서 환영받지 못하셨다는 이야기는, 읽을수록 불편하다.
이방인이나 적대자에게서 거절당한 것이 아니라,
함께 자라온 사람들, 이름과 가족사를 알고 있던 이들에게서 외면당하셨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며 놀라워했다.
지혜와 기적의 소문이 사실임을 눈앞에서 확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놀라움은 곧 못마땅함으로 바뀌었다.
“저 사람은 목수가 아닌가.”
이 말은 사실이었지만, 동시에 벽이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너무 잘 안다고 생각했다.
그 익숙함이 새로운 하느님의 일을 받아들이는 문을 닫아 버렸다.
신앙은 종종 이 지점에서 가려진다.
우리는 하느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그 믿음은 대개 이미 알고 있는 틀 안에서만 작동한다.
예상 가능한 방식, 익숙한 사람,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만 하느님을 받아들인다.
그 틀을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질문하기보다 판단하고, 경탄하기보다 거리를 둔다.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예수님을 평가했다.
어디서 배웠는지, 왜 저런 능력을 가졌는지,
우리 중 한 사람이 어떻게 저럴 수 있는지를 따졌다.
신앙이 질문을 잃고 평가로 바뀌는 순간,
하느님의 일은 더 이상 들어올 자리를 찾지 못한다.
복음은 그 결과를 담담하게 전한다.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큰 기적을 일으키실 수 없었다.
이는 예수님의 능력이 제한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믿음이 그분의 일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믿음을 무시하고 일하지 않으신다.
강요하지 않으신다.
믿음이 닫힌 자리에, 하느님은 억지로 들어오지 않으신다.
이 장면을 신앙인의 눈으로 바라보면,
질문은 자연스럽게 나에게로 돌아온다.
나는 하느님을 어디까지 허용하고 있는가.
혹시 “이 정도일 것”이라는 생각으로
하느님의 일하심을 미리 제한하고 있지는 않은가.
오래 다닌 성당,
반복되는 전례,
익숙한 말씀 속에서 더 이상 놀라지 않는 나 자신은 없는가.
익숙함은 신앙의 적이 아니다.
문제는 익숙함이 경외심을 대체할 때다.
하느님을 잘 안다는 생각이,
다시 들으려는 태도를 밀어낼 때다.
신앙은 처음 믿을 때보다,
오래 믿을수록 더 조심해야 하는 영역일지도 모른다.
시간이 흐를수록 하느님을 소유한 듯 착각하기 쉽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고향에서 싸우지 않으셨다.
설득하려 애쓰지도 않으셨다.
대신 다른 마을로 가셔서 가르치셨다.
하느님의 일은 닫힌 마음을 뚫는 힘이 아니라,
열린 마음을 찾아가는 자유이기 때문이다.
이 장면은 우리에게 위로이면서 동시에 경고다.
하느님은 늘 가까이 계시지만,
그분을 알아보는 일은 결코 자동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익숙함이 신앙을 가릴 때,
우리는 더 이상 기다리지도, 놀라워하지도 않는다.
그저 “알고 있다”는 말로 모든 것을 덮어 버린다.
그러나 신앙은 아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신앙은 다시 듣는 용기, 다시 놀라는 마음,
그리고 익숙한 자리에서 하느님을 새롭게 맞이하려는 태도에서 자란다.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너무 잘 안다고 생각했기에,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다.
이 복음은 오늘의 신앙인에게 조용히 묻는다.
“나는 지금 하느님을 너무 잘 안다고 생각하며,
그분을 내 익숙함 속에 가두고 있지는 않은가?”
신앙은 익숙함을 버리는 일이 아니라,
익숙함 너머에서 다시 경외하는 법을 배우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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