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말씀] 갈릴래아의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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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생명 회복의 소문은 어떻게 이동하는가 —
식품을 연구해 온 사람의 눈으로 마테오복음(4장 12-25절)을 읽으면,
예수님의 이동은 단순한 지리적 변화가 아니다.
그것은 먹고 사는 문제의 한가운데로 들어가신 선택처럼 다가온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이 잡혔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정치와 종교의 중심에서 물러나 갈릴래아로 향하신다.
그것도 나자렛을 떠나 카파르나움, 곧 호숫가에 자리를 잡으신다.
갈릴래아는 당시에도 변방이었다.
‘이민족들의 갈릴래아’라는 표현은 혼혈과 혼합의 땅,
종교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순수하지 않다고 여겨지던 지역을 뜻한다.
그러나 식품인의 관점에서 보면,
바로 이런 곳이 삶의 에너지가 가장 빠르게 소모되는 현장이다.
어부들은 새벽부터 그물을 던지고,
농부들은 비와 토양에 생계를 의탁하며,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사람들이 모여 살던 곳이다.
말하자면 갈릴래아는 식량 생산과 소비가 가장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는 공간이었다.
이사야의 예언,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는 말씀은
식품인의 언어로 옮기면 이렇게 들린다.
영양 결핍과 생존 불안 속에 놓인 공동체에 공급이 시작되었다는 선언이다.
빛은 단지 시적인 상징이 아니다. 빛은 생명을 살리는 조건이다.
광합성이 없으면 곡식이 자라지 않고, 빛이 없으면 생산도 없다.
어둠은 단순한 영적 상태가 아니라, 굶주림과 질병, 불안정한 노동과 생존을 포함한 총체적 결핍 상태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첫 말씀,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선언 역시
식품인의 눈으로 보면 도덕적 자책을 요구하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삶의 방향 전환, 곧
어떻게 먹고, 어떻게 나누며,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에 대한
생활 질서의 재설계 요청에 가깝다.
하늘 나라는 저편의 세계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생명이 회복되는 구조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예수님은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고치신다.
복음서가 나열하는 병명들은 놀라울 만큼 구체적이다.
질병, 고통, 간질, 중풍.
식품과학의 언어로 옮기면 이는
영양 불균형, 만성 스트레스, 감염, 노동 과부하가 겹쳐 나타나는 시스템 붕괴의 징후들이다.
예수님의 치유는 단순한 기적의 나열이 아니라,
붕괴된 생명 시스템을 정상 범위로 되돌리는 과정처럼 보인다.
이때 복음서는 중요한 한 문장을 덧붙인다.
그분의 소문이 시리아, 데카폴리스, 예루살렘, 유다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종교적 영향력이 아니다.
생존의 가능성이 이동했다는 신호다.
먹고 살 길이 막힌 사람들이,
몸이 회복될 가능성이 있는 곳으로 이동하는 것은
인류가 오래전부터 반복해 온 본능적 행동이다.
식량이 있는 곳으로 이동하고,
치유가 가능한 곳으로 모여드는 것.
예수님을 따르는 군중의 행렬은
신앙 집단의 행진이기 이전에
생명 회복을 향한 가장 원초적인 이동이었다.
여기에서 비로소, 동방박사의 이야기는 생뚱맞지 않게 이어진다.
만일 갈릴래아에서 일어난 이 일들이 이렇게 빠르게 여러 도시와 지역으로 퍼져 나갔다면,
이집트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야기는 어떠했겠는가.
노예 집단이 강대국 파라오 제국을 빠져나오고, 바다가 갈라졌다는 사건은
단순한 종교적 체험이 아니라
당대 세계 질서를 흔드는 생존 서사였다.
그 소문이 무역로와 유배 공동체, 학문 네트워크를 따라
동방으로 퍼져 나갔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당시 천문 관측자들은 하늘의 변화를 단순한 자연현상이 아니라
역사의 변곡점을 알리는 데이터로 읽었다.
별자리의 이상 현상은 우연이 아니라,
이미 지상에서 일어나고 있던 변화와 공명하는 신호였다.
그래서 예수님의 탄생 시 관측된 별의 이상은
“무언가 시작되고 있다”는 하늘의 언어로 해석되었고,
그 해석의 결과가 바로 동방박사들의 이동이었을 것이다.
오늘의 복음은 이렇게 읽힌다.
예수님은 빵과 물, 몸과 노동, 질병과 회복이 얽혀 있는
현실의 식탁 한가운데로 들어오셨다.
하늘 나라는 제단 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호숫가의 그물 옆, 병든 몸 곁, 허기진 삶의 자리에서 시작되었다.
식품인의 눈으로 보면,
그분의 복음은 영혼만을 위한 메시지가 아니라
몸을 살리고, 먹고 사는 질서를 회복하는 선언이었다.
그래서 갈릴래아에서 떠오른 그 빛은
오늘 우리의 식탁 위에서도 여전히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지금,
어떤 소문을 퍼뜨리고 있으며
누구의 어둠 속에 빛을 공급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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