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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지온(司基之溫) ― 마음을 데우는 믿음의 시간

제임스
2025-11-02 17:06 48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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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영세를 받기 전, 신부님은 늘 말씀하셨다.

영세는 단순히 물을 머리에 붓는 의식이 아니라,
그 전에 마음을 준비하는 과정이 더 중요하단다.”
그때 처음 들었던 낯선 말이 바로 사기지온(司基之溫)’이었다.
그 말의 뜻을 알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믿음의 기초를 세우는 시간

 

사기(司基)’기초를 다스린다는 뜻이다.
, 신앙의 바탕을 세우고 그 위에 믿음의 집을 짓는 과정이다.
당시에는 교리문답서의 문항들을 일일이 외워야 했다.
십계명, 신경, 주님의 기도, 성모송, 성사에 관한 설명까지,
문장 하나라도 틀리면 다시 처음부터 배워야 했다.
어린 마음에는 마치 시험공부 같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은 하느님을 이해하기 위한 문을 여는 열쇠였다.
단순한 암기가 아니라, 그 말씀들이 내 마음에 스며드는 시간이었다.

 

마음의 온기를 키우는 지온(之溫)’

 

지온은 문자 그대로 그 따뜻함이라는 뜻이다.
여기서의 ()’은 단순한 따뜻함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이 스며드는 온기를 말한다.
믿음은 차가운 이성만으로는 자라지 않는다.
그 뿌리는 언제나 따뜻한 사랑과 회개의 눈물 속에서 싹튼다.
그래서 사기지온은 머리로 배우는 공부가 아니라
가슴으로 익히는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그 시절 신부님은 이렇게 가르치셨다.

하느님은 준비된 마음에 은총을 주신다.
마음이 차가우면 은총은 머물지 못한다.”

그 말씀이 마음에 남았다.
마치 겨울 밭에 씨를 뿌려도 흙이 얼어 있으면 싹이 트지 않듯,
내 마음이 식어 있다면 믿음의 씨앗도 자라지 못한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사기지온은 바로 그 마음을 녹이는 시간이었다.

 

은총의 불씨가 타오르는 순간

 

사기지온의 마지막 시기는 영세 직전의 며칠이었다.
그동안 배운 교리를 다시 되새기며
자신의 죄를 돌아보고 고해성사를 준비했다.
그 순간 느껴지는 부끄러움, 회한, 그리고 안도감이 뒤섞여
마음 깊은 곳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일어났다.
그것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하느님이 내 안에 불씨로 들어오시는 체험이었다.

세례성수가 머리를 적실 때
그 불씨는 눈에 보이지 않게 타올랐다.
그때의 따뜻함이 평생 신앙의 온도로 남았다.

 

오늘날 교리 과정은 훨씬 단순해졌고,
사람들은 짧은 시간 안에 세례를 받는다.
그러나 신앙의 깊이는 여전히 사기지온의 정신 위에서 자란다.
기도할 때, 말씀을 들을 때, 용서할 때마다
우리는 다시 그때의 사기지온으로 돌아가야 한다.

믿음은 지식이 아니라 온기다.
하느님을 향한 사랑이 식으면, 아무리 많은 교리를 알아도
그것은 차가운 돌덩이처럼 메말라 버린다.
사기지온의 마음은 바로 그 돌을 녹이는 불이다.

 

하느님께 다가가기 전,
먼저 내 마음을 따뜻하게 만드는 시간이다.
기도의 불씨를 살리고, 회개의 눈물로 마음을 씻으며,
사랑의 온기로 믿음의 기초를 데우는 과정을 통해

하느님은 그 따뜻한 마음 안에서 우리를 만나신다.
그분의 은총은 언제나 사기지온의 온기 속에 머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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