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10.6)의 독서 말씀] 과거가 나의 마지막 모습은 아니다 갈라티아서 (1,13-24)
제임스
2026-10-06 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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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사람을 오래 알고 지내다 보면 그 사람에 대한 이미지가 생긴다.
“그 사람은 원래 그런 사람이야.”
한번 만들어진 평가는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과거에 큰 잘못을 저지른 사람에게는 더욱 그렇다.
그런데 오늘 갈라티아서에 등장하는 바오로 사도의 과거를 생각하면 놀랍다.
그는 처음부터 복음을 전하던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정반대였다.
“나는 하느님의 교회를 몹시 박해하며 아예 없애 버리려고 하였습니다.”
그는 유다교의 전통을 지키는 일에서도 누구보다 열심이었다.
문제는 그의 열심이 잘못된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자동차가 아무리 빠르게 달려도 방향을 잘못 잡으면 목적지에서 멀어지듯이, 열심히 산다는 것이 언제나 옳게 산다는 뜻은 아니다.
그런 바오로의 인생에 결정적인 전환이 찾아온다.
오늘 말씀에서 눈에 들어오는 단어가 있다.
“그러나.”
나는 교회를 박해하였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나를 부르셨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나를 부르셨다.
이 ‘그러나’ 하나가 바오로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하느님께서는 그의 과거를 모르셨던 것이 아니다. 그가 교회를 박해했다는 사실을 모두 알고 계셨다.
그런데도 그를 버리지 않으시고 오히려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부르셨다.
여기에서 은총의 신비를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사람의 과거를 보고 미래까지 판단하려 한다.
“저 사람은 안 돼.”
“이미 너무 늦었어.”
때로는 자기 자신에게도 그렇게 말한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가만 보시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될 수 있는가도 바라보신다.
그래서 신앙에는 언제나 다시 시작할 가능성이 있다.
바오로는 회심하자마자 사람들의 인정부터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마스쿠스로 돌아왔고, 삼 년이 지나서야 예루살렘에서 케파를 만났다.
그에게도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방향으로 살아갈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잘못을 깨달았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완전히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회심은 한순간의 깨달음으로 시작될 수 있지만, 변화는 시간을 통하여 삶으로 증명되는 것이다.
마침내 사람들은 바오로에 대하여 말한다.
“한때 우리를 박해하던 그 사람이 지금은 자기가 한때 그렇게 없애 버리려고 하던 믿음을 전한다.”
없애려던 사람이 전하는 사람이 되었다.
박해하던 사람이 복음을 위해 박해받는 사람이 되었다.
이 말씀을 읽으며 나 자신의 삶도 돌아보게 된다.
살아오면서 확실하다고 믿었던 것이 틀렸음을 깨달은 적도 있었을 것이고, 잘못 판단했던 사람을 다시 보게 된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그럴 때 “내가 틀렸습니다.”라고 인정하는 것은 쉽지 않다. 나이가 들고 경험이 쌓일수록 더욱 그럴 수 있다.
그러나 바오로는 자신의 과거를 숨기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잘못된 방향으로 달리고 있었음을 솔직하게 고백했다.
신앙의 성숙은 한 번도 틀리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틀렸음을 깨달았을 때 방향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늘 말씀의 마지막 구절이 인상적이다.
“그들은 나 때문에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사람들이 바오로를 칭찬했다고 하지 않는다.
변화된 바오로를 보며 하느님을 찬양했다.
어쩌면 이것이 신앙인이 남길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일 것이다.
사람들이 나를 보고 “대단한 사람이다”라고 말하기보다,
“저 사람의 삶을 보니 하느님의 은총이 얼마나 큰지 알겠다.”
라고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오늘 나 자신에게 묻는다.
나는 과거의 나에게 너무 붙잡혀 있지는 않은가.
또 다른 사람을 그의 과거만으로 판단하고 있지는 않은가.
또 다른 사람을 그의 과거만으로 판단하고 있지는 않은가.
과거는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말해 줄 수는 있지만, 내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결정하지는 않는다.
바오로의 삶이 그것을 보여 준다.
그리고 우리의 삶에도 하느님께서 써 내려가실 ‘그러나’ 다음의 이야기는 아직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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