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말씀] 하느님께서 좋아하는 단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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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사순절이 시작되기 전 월요일이나 화요일이면,
괜히 고기를 더 든든히 먹어 두었던 기억이 납니다.
곧 단식과 금육이 시작되니 미리 채워 두자는 생각이었지요.
브라질의 삼바 축제가 사순절 직전에 열리는 이유도 비슷하겠지요.
금욕의 시기를 앞두고 한껏 즐겨 두자는 심리 말입니다.
조삼모사(朝三暮四)입니다.
형식은 지키되, 정신은 비껴 가는 태도.
율법은 따르되, 마음은 그대로 두는 방식입니다.
그때 이사야 예언자의 외침이 들려옵니다.
“목청껏 소리쳐라. 망설이지 마라.”
그의 음성은 속삭임이 아니라 나팔 소리입니다.
왜냐하면 종교가 겉모습만 남고
심장은 멈춰 버릴 위험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하느님을 찾습니다.
기도하고, 단식하고, 고행하며
하느님께 가까이 있기를 갈망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묻습니다.
“이것이 내가 좋아하는 단식이냐?”
머리를 숙이고 자루옷을 입는 모습,
형식적으로 경건해 보이는 태도가
과연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단식이냐고 물으십니다.
문제는 단식 자체가 아닙니다.
문제는 분리입니다.
입으로는 하느님을 찾으면서
손으로는 일꾼을 다그치고,
단식한다면서 다투고 싸우는 모순.
신앙과 삶이 나뉘어 있는 상태,
그것이 하느님을 슬프게 합니다.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단식은 다른 모습입니다.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하며,
굶주린 이와 네 양식을 나누는 것.”
단식은 음식의 양을 줄이는 행위가 아니라
내 욕심의 자리를 줄이는 행위입니다.
배를 비우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마음을 비우는 것이 목적입니다.
내가 덜 먹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더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참된 금식입니다.
신앙인의 금식은
하느님께 보이기 위한 고행이 아니라
이웃에게 흘러가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묻습니다.
“왜 제 기도를 들어 주지 않으십니까?”
그러나 하느님은 이미 답을 주고 계십니다.
이웃의 멍에를 풀어 줄 때,
굶주린 이에게 손을 내밀 때,
그 자리에서 하느님은 말씀하십니다.
“나 여기 있다.”
그리고 약속하십니다.
“그리하면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고
너의 상처가 곧바로 아물리라.”
놀라운 말씀입니다.
남을 살리는 일이 결국 나를 치유합니다.
이웃을 자유롭게 하는 일이
내 마음의 묶인 매듭을 풀어 줍니다.
신앙은 하늘을 향해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옆 사람을 향해 손을 펴는 순간,
그때 비로소 살아 움직입니다.
이사야의 나팔 소리는
우리의 경건을 무너뜨리려는 소리가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이 다시 숨 쉬도록 깨우는 소리입니다.
사순절은 덜 먹는 계절이 아니라 더 사랑하는 계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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