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의 복음 말씀] “보라”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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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세례자 요한의 증언은 언제나 조금 낯설다.
그는 예수님을 향해 가장 위대한 고백을 하면서도, 동시에 이렇게 말한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이미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있었고,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수많은 사람을 강으로 불러 모으던 사람이다.
그런 그가, 자신이 증언하는 예수님에 대해 두 번이나 같은 말을 반복한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이 말은 겸손의 표현이 아니다.
오히려 신앙의 가장 정직한 출발점이다.
요한은 예수님을 ‘알아서’ 증언하지 않는다.
그는 단지 보았기 때문에 말한다.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내려와 그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고,
그 징표가 바로 그분이라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다.
요한의 믿음은 해석이 아니라 목격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그의 첫마디는 설명이 아니라 외침이다.
“보라.”
요한은 사람들을 자기 쪽으로 끌어오지 않는다.
자신의 역할은 단 하나, 시선을 옮겨 주는 것이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요한의 위대함은 여기 있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를 말하지 않고,
자신이 누구를 가리키는지만 분명히 한다.
명동 밥집에서 만났던 그 노숙자의 얼굴이 떠오른다.
밥과 국을 일곱 번이나 더 드시며,
“언제 이렇게 배불리 먹을 수 있을지 몰라서요”라고 말하던 그분.
그 순간, 나는 그분을 ‘이해’한 것이 아니라 보았다.
배고픔의 무게를,
삶의 결핍을,
그리고 그럼에도 밥상 앞에 앉아 있는 한 사람의 존엄을.
신앙은 종종 설명하려 들 때 흐려진다.
그러나 볼 때, 곁에 머무를 때, 같은 자리에 앉을 때 또렷해진다.
요한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어린양”이라 부른다.
힘센 사자도 아니고, 불을 내리는 심판자도 아니다.
죄를 없애시는 분이지만, 그 방식은 폭력이 아니라 자기 내어줌이다.
어린양은 저항하지 않고, 도망치지 않고, 조용히 맡겨진 길을 간다.
요한은 말한다.
“그분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
물로 씻는 세례는 겉을 바꾸지만,
성령의 세례는 사람의 존재의 방향을 바꾼다.
사울이 기름부음을 받았을 때 삶의 소유권이 바뀌었듯,
성령의 세례를 받은 사람은 더 이상 자기만을 위해 살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요한의 증언은 여기서 끝난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
증언은 설명이 아니라 삶의 위치를 바꾸는 고백이다.
이제 요한은 중심이 아니다.
그는 물러나고, 시선은 예수님께로 향한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증언하고 있는가.
말로는 예수님을 이야기하지만,
정작 사람들의 시선은 여전히 나 자신을 향하고 있지는 않은가.
요한처럼 말할 수 있다면 좋겠다.
“나도 다 알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말할 수 있다면 좋겠다.
“그러나 나는 보았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덧붙일 수 있다면,
“보십시오. 그분이 여기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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