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성경말씀] 돼지고기 앞에서 드러난 신념의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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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고교 시절, 나는 이상하게도 돼지고기를 먹지 않았다. 왜 그랬는지는 지금도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린 마음에 어떤 나쁜 기억이 스쳤던 것인지, 어쩌면 설명할 수 없는 작은 트라우마가 있었던 것인지 모른다.
그저 돼지고기만 보면 젓가락이 멈추곤 했고, 친구들의 장난 섞인 권유에도 묘한 거부감이 밀려왔다.
그러던 어느 봄날, 담임선생님의 한마디는 내게 번개처럼 내리꽂혔다.
“종교적인 이유로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친구도 있겠지만, 여러분이 앞으로 반 근 정도의 돼지고기를 대학 입시 날까지 매일 먹지 않으면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기가 어렵다. 고3 여름이 되면 체력이 고갈돼서 공부는커녕 졸음과 싸우게 된다. 그 체력을 버티려면 가장 값싸고 든든한 음식이 바로 돼지고기다.”
그 말은 충격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성적이 오르락내리락하는 시기였는데, 대학에 가기 위해 돼지고기를 먹어야 한다니.
나에게는 마치 커다란 벽처럼 느껴지는 요구였다.
나는 종교적 사명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민족적 정체성에 충실한 것도 아니었지만, 그 말 앞에서 이상한 고집이 올라왔던 것 같다.
먹고 싶지 않은 음식을 억지로 먹으라는 압박이 나의 작은 세계에서는 꽤 큰 싸움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조용히 길을 열어 주셨다.
“그래도 공부해야지. 네가 좋아하는 탕수육이라면 괜찮지 않겠니?”
그날부터 어머니는 매일 새벽 일찍 일어나시어 탕수육을 만들어 주셨다.
기름 냄새가 새벽 공기를 가르는 동안, 나는 식탁 앞에서 그 따뜻한 접시를 애써 받아들였다.
어머니의 정성이 튀김옷처럼 둘러진 덕분이었을까. 나는 조금씩 돼지고기를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어머니의 사랑으로 만든 그 음식은 내게 체력만이 아니라 마음의 버팀목이 되었다.
그 시절의 경험은 훗날 마카베오기 하권의 엘아자르 이야기를 다시 읽을 때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물론 비교할 수 없는 이야기이지만, 음식이 인간의 마음과 정체성을 얼마나 깊이 흔드는지, 그 무게를 내 삶의 작은 경험을 통해 조금은 느끼게 되었기 때문이다.
엘아자르는 나이 든 이에게서만 풍기는 묵직한 향기를 지닌, 고결한 노학자였다.
그의 백발은 세월이 남긴 은빛이었고, 걸음에는 진실함과 일생의 신의가 담겨 있었다.
그러나 어느 날, 그는 강제로 입을 벌리고 돼지고기를 먹으라는 위협 앞에 서게 된다.
잠시의 타협이면 목숨을 건질 수 있었지만, 엘아자르는 그 길을 택하지 않았다.
입술에 닿는 순간 고기를 뱉어 버리고, 형틀을 향해 스스로 걸어가는 그의 모습은
오히려 젊은 나무처럼 곧고 단단했다.
고대에서 음식은 단지 배를 채우는 물질이 아니었다.
먹는다는 행위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어떤 신을 섬기며
어떤 삶의 질서 안에 있는지를 드러내는 고백이었다.
특히 이교 제사에 쓰인 돼지고기는
헬레니즘 정권이 유다인들의 정체성을 무너뜨리려 사용한 상징이었다.
그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단순한 섭취가 아니라 ‘신앙의 경계를 허무는 행위’였다.
이스라엘에게 음식 규정은 곧 하느님께 대한 충성의 표지였고,
율법은 자신들을 지키는 마지막 울타리였다.
그러니 엘아자르에게 돼지고기 한 조각은 단순한 조각이 아니었다.
신앙과 정체성 사이를 가르는 날카로운 칼날이었다.
사람들은 엘아자르를 살리기 위해 아슬아슬한 타협을 제안했다.
먹어도 괜찮은 고기를 준비해 줄 테니, 겉으로만 이교 음식처럼 보이면 된다고—
겉보기에는 배려처럼 보이지만, 실은 신앙의 뿌리를 흔드는 위험한 길이었다.
그러나 그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작은 가장 하나가 젊은이들의 마음에 얼마나 큰 그림자를 남길지 그는 알고 있었다.
그의 삶은 오랜 세월 쌓인 무게만큼 정직했고,
그 무게는 마지막 순간까지 흐트러지지 않았다.
매를 맞아 쓰러져 가던 순간에도 그는 주님께 큰 소리로 고백했다.
몸은 채찍의 고통에 흔들렸지만,
마음은 경외심으로 가득 찼다고.
그의 마지막 말은 한 장의 꽃잎처럼 깨끗하고 단아했다.
그의 죽음은 비극이 아니었다.
젊은이들에게 남긴 고결함의 유산이었고,
온 민족에게 전해 준 향기로운 모범이었다.
음식 하나에 담긴 신앙의 무게를 초연하게 드러낸 그의 걸음은
가을 저녁 햇살처럼 길게, 오래도록 남아 우리를 비춘다.
그리고 나는 문득,
어머니가 매일 새벽에 만들어 주시던 그 따뜻한 탕수육을 떠올린다.
음식은 언제나 단순한 음식이 아니다.
어떤 날은 사랑이고, 어떤 날은 정체성이고,
또 어떤 날은 신앙을 지키는 조용한 울림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오늘도 식탁 앞에서,
때로는 작은 한 조각의 음식 앞에서
나 자신과 신념, 그리고 하느님 앞의 나를 깊이 들여다보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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