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의 독서 말씀] 나는 심었을 뿐이다 : 코린터 1서 (3,1-9)
제임스
2026-09-01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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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씨앗을 화분에 심어 놓고 매일 들여다본다고 해서 싹이 빨리 나오는 것은 아니다.
물을 주고 햇볕이 들도록 해 줄 수는 있지만, 씨앗을 억지로 잡아당겨 싹을 틔울 수는 없다.
사람을 키우는 일도, 신앙 공동체가 성장하는 일도 이와 비슷하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신자들을 향해 조금 따끔한 말을 한다.
“나는 여러분에게 젖만 먹였을 뿐 단단한 음식은 먹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신앙 안에서 아직 어린아이와 같다는 것이다.
바오로가 말하는 미성숙은 지식의 부족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들 가운데 시기와 싸움, 편 가르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바오로가 말하는 미성숙은 지식의 부족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들 가운데 시기와 싸움, 편 가르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바오로 편이다.”, “나는 아폴로 편이다.”
이 모습은 오늘날에도 낯설지 않다.
오래전 교포들과 공소생활을 하던 시절의 일이다.
신자들이 어렵게 모은 기금으로 마이크로버스 한 대를 구입하였다. 미사 때 라이드가 필요한 노약자들을 돕자는 좋은 취지였다. 그런데 주말에만 사용하다 보니 일부에서는 평일에도 신자들이 사용할 수 있게 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반면 신부님께서는 어려운 공소 살림에서 차량을 오래 사용하려면 본래 목적대로 주말에만 운행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셨다.
차량 사용에 대한 의견이 맞서면서 신자들은 두 편으로 갈라졌다. 서로 티격태격하다 감정의 골이 깊어졌고, 급기야 상대
사람을 키우는 일도, 신앙 공동체가 성장하는 일도 이와 비슷하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신자들을 향해 조금 따끔한 말을 한다.
“나는 여러분에게 젖만 먹였을 뿐 단단한 음식은 먹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신앙 안에서 아직 어린아이와 같다는 것이다.
바오로가 말하는 미성숙은 지식의 부족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들 가운데 시기와 싸움, 편 가르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바오로가 말하는 미성숙은 지식의 부족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들 가운데 시기와 싸움, 편 가르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바오로 편이다.”, “나는 아폴로 편이다.”
이 모습은 오늘날에도 낯설지 않다.
오래전 교포들과 공소생활을 하던 시절의 일이다.
신자들이 어렵게 모은 기금으로 마이크로버스 한 대를 구입하였다. 미사 때 라이드가 필요한 노약자들을 돕자는 좋은 취지였다. 그런데 주말에만 사용하다 보니 일부에서는 평일에도 신자들이 사용할 수 있게 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반면 신부님께서는 어려운 공소 살림에서 차량을 오래 사용하려면 본래 목적대로 주말에만 운행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셨다.편 사람들에게 미사에 나오지 말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갈등이 심해졌다.
노약자를 돕기 위해 마련한 자동차가 오히려 공동체를 갈라놓는 원인이 되어 버린 것이다.
본래의 목적은 사라지고 ‘무엇이 옳은가’보다 ‘나는 누구 편인가’가 더 중요해져 버렸다.
코린토 공동체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나는 바오로 편이다.”
“나는 아폴로 편이다.”
그래서 바오로는 묻는다.
“도대체 아폴로가 무엇입니까? 바오로가 무엇입니까?”
그리고 자신과 아폴로를 ‘일꾼일 따름’이라고 낮춘다.
이어지는 말씀이 더욱 마음에 와닿는다.
“나는 심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자라게 하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교사는 씨를 뿌릴 수 있고 부모는 물을 줄 수 있다.
친구가 햇볕이 되어 줄 수도 있고,
어려울 때 만난 누군가는 쓰러지지 않도록 버팀목이 되어 줄 수도 있다.
그러나 한 사람이 성장하는 것은 어느 한 사람의 힘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가 잘되었다고 ‘내가 키웠다.’고 자랑할 필요도 없고,
기대만큼 성장하지 않았다고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돌릴 필요도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정성껏 씨를 뿌리고 물을 주는 데까지이다.
자라게 하는 것은 우리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오로는 우리를 “하느님의 협력자”라고 부른다.
참 아름다운 표현이다.
내가 주인이 아니라 협력자라는 것이다.
이 사실을 잊으면 ‘내 의견이 옳다’는 생각이
어느새 ‘내가 이겨야 한다’는 생각으로 바뀌기 쉽다.
그러나 내가 하느님의 협력자일 뿐임을 기억한다면,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 역시 하느님께서 쓰시는 또 하나의 협력자일 수 있음을 인정하게 된다.
돌이켜 보면 그때 공소에서 우리에게 필요했던 질문도 이것이 아니었을까.
‘누구 편이 옳은가’를 따지기 전에
‘우리가 처음 이 차를 마련한 이유가 무엇이었는가?’
‘우리가 처음 이 차를 마련한 이유가 무엇이었는가?’
처음의 목적을 다시 생각했더라면 갈등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신앙생활에서도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보다
우리가 왜 함께 모였는지를 잊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좋은 씨앗을 뿌리고 정성껏 물을 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씨앗이 언제 싹을 틔우고 어떻게 자랄지는 하느님께 맡긴다.
나는 심고 물을 줄 뿐이다.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다.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다.
내가 주인이 아니라 하느님의 협력자임을 아는 것,
그리고 나와 다른 사람도 하느님의 협력자일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
어쩌면 그것이 ‘내 편’과 ‘네 편’을 넘어서는 신앙의 성숙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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