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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영성 강좌 5주차] 보이지 않는 손, 효소와 영성

제임스
2026-04-18 11:41 4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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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엌에서 국이 끓고 있을 때, 우리는 눈앞의 재료들을 바라본다.
, 채소, 고기, 양념. 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하나의 맛을 만들어내지만,
정작 그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식품과학자의 눈으로 들여다보면, 그 안에서는 수많은 효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생명의 변화를 이끌고 있다
나는 종종 이 보이지 않는 효소의 세계를 바라보며,
인간의 삶 속에 흐르는 또 다른 보이지 않는 영역, 곧 영성을 떠올리곤 한다.

 

효소는 참으로 묘한 존재이다. 그것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색도 없고, 소리도 없으며, 맛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효소가 없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음식은 소화되지 않고, 영양은 흡수되지 않으며, 생명은 유지될 수 없다.

영성 또한 그러하다.

기도는 눈에 보이지 않고, 은총은 손에 잡히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없는 삶은 어딘가 메마르고, 방향을 잃기 쉽다.

우리는 종종 삶의 변화를 눈에 보이는 결과에서 찾으려 하지만,
실제로 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작용하는 힘이다.

 

효소의 또 하나의 특징은, 자신은 소모되지 않으면서도 변화를 일으킨다는 점이다.

화학 반응을 촉진시키되, 그 과정에서 자신은 그대로 남는다.

이 점에서 깊은 영성의 모습을 본다.

진정한 사랑은 상대를 억지로 바꾸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사랑은 결국 상대를 변화시킨다.

깊은 기도 또한 무엇인가를 강요하지 않는다.
그러나 기도하는 사람의 삶을 서서히 바꾸어 놓는다
.

효소가 반응의 속도를 바꾸듯, 영성은 삶의 방향을 바꾼다.

그리고 그 변화는 언제나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일어난다.

 

하지만 효소는 아무 때나 작용하지 않는다.

적절한 온도와 pH, 그리고 맞는 기질이 있어야만 비로소 활성화된다.

이 사실은 나에게 중요한 깨달음을 준다. 영성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마음이 닫혀 있을 때, 아무리 좋은 말씀이 있어도 스며들지 않는다.
교만과 집착이 가득할 때, 은총은 머물 자리를 찾지 못한다.

겸손, 기다림, 그리고 받아들이려는 마음
이러한 조건이 갖추어질 때 비로소 영성은 작용하기 시작한다.

마치 효소가 적절한 환경 속에서만 활발히 움직이듯,
영성 또한 준비된 마음 안에서만 생명을 일으킨다.

 

효소의 작용은 매우 미세하다. 분자 하나, 결합 하나를 바꾸는 작은 변화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작은 변화가 쌓여 결국 생명 전체를 움직인다.

나는 여기서 인간 삶의 진실을 본다.

인생을 바꾸는 것은 거대한 사건이 아니라 작은 선택들이다.

한 번의 용서,
한 번의 양보,
한 번의 진심 어린 말.

이러한 미세한 변화들이 모여 사람의 인격을 만들고, 삶의 방향을 바꾼다.

효소가 생명을 조용히 변화시키듯, 영성은 인간을 조용히 빚어간다.

 

효소에는 억제제와 활성제가 있다. 어떤 물질은 효소의 작용을 방해하고,

어떤 물질은 그것을 더욱 활발하게 만든다. 이 구조를 바라보며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내 삶에는 어떤 내면의 억제제가 있는가.

분노, 탐욕, 교만은 영성의 흐름을 막는 억제제와도 같다.

반대로 사랑, 감사, 겸손은 영성을 활성화시키는 촉매와 같다.

우리는 매일의 삶 속에서 어떤 물질을 선택하듯 어떤 마음을 선택하며 살아간다.

그 선택이 쌓여 결국 우리의 삶의 반응 속도와 방향을 결정한다.

 

발효를 연구하면서 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을 배웠다.

효소는 혼자 작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생물들이 만들어내는 수많은 효소들이 서로 연결되어 하나의 변화를 만들어낸다.

된장이 익고, 김치가 깊어지는 과정은 개별 존재의 활동이 아니라

함께 만들어내는 생명의 협주이다. 이 모습은 신앙 공동체와도 닮아 있다.

한 사람의 믿음이 아니라 서로의 작용이 더해질 때

공동체는 비로소 깊어지고 성숙해진다.

발효가 시간이 지나며 맛을 더하듯, 공동체의 영성 또한 시간 속에서 깊어진다.

 

효소 반응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아무리 조건이 갖추어져 있어도 순간적으로 결과가 나타나지는 않는다.

기다림이 필요하다. 영성도 그렇다.

기도한다고 해서 곧바로 모든 것이 해결되지는 않는다.
회개한다고 해서 즉시 변화가 완성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변화는 일어난다.

효소가 반응을 완성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하듯,

영성도 인간을 완성하기까지 시간을 요구한다.

나는 때때로 생각한다. 우리의 삶은 거대한 힘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작은 힘들에 의해 움직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효소가 그렇고, 영성이 그렇다.

효소는 생명의 내부에서 작용하는 보이지 않는 손이고,
영성은 인간의 삶을 이끄는 보이지 않는 손이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에 쉽게 마음을 빼앗기지만,
정작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일어나는 작용들이다.

 

부엌에서 익어가는 음식처럼,

우리의 삶 또한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서 조용히 변화하고 있다.

보이지 않는 효소가 그 변화를 이끌고 있듯,
보이지 않는 은총이 우리의 삶을 빚어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삶을 조금 더 깊은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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