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영성 강좌 4주차] 발효와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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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발효를 바라보면 우리는 한 가지 깊은 사실과 마주하게 된다. 눈앞에 놓인 것은 단순한 음식이지만,
그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결코 단순하지 않다. 우리가 보는 것은 겉모습에 불과하고,
실제로 그 변화를 이루는 주체는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들이다.
이 작은 깨달음은 발효를 단순한 식품 가공의 영역에서 끌어올려, 인간의 삶과 영성을 성찰하게 하는
하나의 창으로 만들어 준다. 특히 발효의 세계는 우리에게 세 가지 중요한 메시지를 전한다.
보이지 않는 은총, 보이지 않는 생명의 협력, 그리고 인간의 겸손이다.
발효는 인간이 만들어 낸 기술이라기보다, 자연이 이미 준비해 놓은 질서 속에 인간이 조심스럽게
참여하는 과정이다. 우리는 콩을 삶아 메주를 만들고, 그것을 항아리에 담아 두거나,
배추에 소금을 뿌려 김치를 담근다. 그러나 그 이후에 일어나는 변화는 인간의 손을 떠난다.
그 모든 과정은 자연 속에 살아 있는 미생물들의 몫이 된다. 메주 속에 스며든 수많은 미생물들은
눈으로는 전혀 보이지 않지만, 콩 단백질을 아미노산으로 분해하고 전분을 당으로 바꾸며,
마침내 우리가 ‘깊은 맛’이라고 부르는 복합적인 향을 만들어 낸다.
인간은 시작을 할 뿐, 완성은 자연의 보이지 않는 생명들이 이루어 준다.
이 사실을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면, 그것은 하나의 은총으로 다가온다.
우리의 삶 역시 이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계획을 세우고 노력하며 살아가지만, 삶의 많은 부분은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도움 속에서 이루어진다. 누군가의 사소한 배려, 예상하지 못한 만남, 설명할 수 없는 기회들이 우리의 길을 바꾸어 놓는다.
마치 발효가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의 활동 속에서 완성되듯이,
우리의 삶도 보이지 않는 은총 속에서 서서히 깊어지고 성숙해 간다.
한편 발효의 세계를 더 깊이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협력이라는 또 하나의 중요한 원리가 숨어 있다.
발효는 결코 하나의 미생물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는다. 김치의 경우를 보더라도,
처음에는 Leuconostoc과 같은 균들이 활동을 시작하여 환경을 산성으로 바꾸고,
이어서 Lactobacillus와 같은 젖산균들이 그 조건 속에서 안정적인 발효를 이끌어 간다.
이처럼 서로 다른 미생물들이 시간에 따라 역할을 나누고, 서로의 조건을 만들어 주며 하나의 결과를 완성해 낸다. 김치의 깊은 맛은 단일한 생명의 산물이 아니라, 수많은 생명이 협력하여 만들어 낸 공동의 작품이다.
이 모습은 인간 사회와 놀라울 만큼 닮아 있다. 우리는 종종 개인의 능력과 성취를 강조하지만,
실제로 어떤 공동체도 한 사람의 힘만으로 유지될 수 없다.
가정도, 교회도, 사회도 각기 다른 역할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를 보완하며 협력할 때 비로소 건강하게 유지된다. 발효는 우리에게 경쟁보다 협력이 더 본질적인 생명의 원리임을 조용히 일깨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생명들이 서로를 밀어내지 않고 조화를 이루어 하나의 풍요로운 맛을 만들어 내듯이,
인간 공동체 역시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할 때 더욱 깊고 넉넉한 삶을 이루게 된다.
이러한 모든 과정을 통해 발효는 인간에게 겸손을 가르쳐 준다.
현대 과학은 발효의 많은 부분을 설명할 수 있게 되었고,
우리는 온도와 습도, 염도 등을 조절하며 발효를 일정 부분 관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발효의 본질적인 과정은 인간의 완전한 통제 밖에 있다.
수많은 미생물들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며 수백 가지의 향미를 만들어 내는지,
그 모든 과정을 인간이 완벽하게 지배할 수는 없다.
그래서 전통 발효 식품을 만드는 사람들은 자연을 대하는 태도에서 특별한 겸손을 지닌다.
그들은 항아리를 햇볕에 두고, 바람이 잘 통하게 하며, 충분한 시간을 기다린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조건을 마련하는 일일 뿐,
생명의 변화를 직접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이 깨달음은 인간의 삶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우리는 스스로 모든 것을 이루어 낸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수많은 보이지 않는 도움과 조건 속에서 살아간다.
자연의 질서, 타인의 손길,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많은 요소들이 함께 작용하여 우리의 삶을 형성한다.
발효는 말없이 우리에게 이야기한다.
인간은 자연의 주인이 아니라,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라고. 그리고 바로 그 사실을 깨달을 때,
인간은 비로소 겸손해지고, 그 겸손 속에서 더 깊은 지혜를 얻게 된다.
이처럼 발효는 단순한 음식의 변화를 넘어, 인간 존재의 본질을 비추어 주는 거울과 같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은총 속에서 삶이 깊어지고, 보이지 않는 협력 속에서 공동체가 완성되며,
그 모든 과정을 통해 인간은 겸손을 배우게 된다.
그래서 발효는 하나의 기술이 아니라, 자연이 우리에게 건네는 조용한 영성의 언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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