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독서 말씀] 궤를 모셔 왔으나, 하느님은 계시지 않았다
본문
이스라엘은 패배했다.
전열이 무너졌고, 사천의 군사가 벌판에 쓰러졌다.
패배의 원인을 묻는 자리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삶을 돌아보지 않았다.
대신 이렇게 말한다.
“실로에서 주님의 계약 궤를 모셔 옵시다.”
그 말은 신앙처럼 들리지만, 실은 계산에 가까웠다.
우리가 하느님을 모시면 이길 수 있다는 생각,
다시 말해 하느님을 승리를 보장하는 수단으로 끌어오는 발상이다.
궤는 하느님의 현존을 상징했지만,
그들에게 궤는 더 이상 관계의 표지가 아니었다.
전쟁터에 들고 나갈 수 있는 성스러운 물건이었을 뿐이다.
궤가 진영에 도착하자 온 이스라엘이 함성을 질렀다.
땅이 흔들릴 만큼의 환호였다.
그러나 그 소리는 믿음의 기쁨이 아니라,
안도감에서 터져 나온 소리였다.
이제 이길 것이라는 확신, 이제 안전하다는 착각.
하느님을 신뢰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을 가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하느님의 이름을 더 잘 기억하고 있었던 쪽은 필리스티아인이었다.
그들은 말했다. “광야에서 이집트를 친 신이 아니냐.”
이스라엘보다 더 정확하게 과거의 이야기를 떠올렸고, 더 두려워했다.
그러나 그 두려움은 필리스티아인을 무너뜨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서로를 격려하며 싸움에 나섰다.
반면, 이스라엘은 이미 싸움을 끝낸 상태였다.
하느님을 모셔 왔으니, 이제 할 일은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결과는 참혹했다.
삼만의 보병이 쓰러졌고, 궤는 빼앗겼으며, 엘리의 두 아들은 전사했다.
하느님은 궤와 함께 묶여 있지 않았다.
하느님은 자신을 소유하려는 손에 붙잡히지 않으셨다.
이 사건의 비극은 패배 그 자체가 아니다.
진짜 비극은, 이스라엘이 하느님을 함께 걸어야 할 분이 아니라,
필요할 때 꺼내 쓰는 분으로 여겼다는 데 있다.
우리는 궤를 들고 전쟁터에 나가는 이스라엘과 크게 다르지 않다.
기도를 하고, 성당에 가고, 말씀을 들으며
마음 한편으로는 이렇게 기대한다.
“이 정도 했으니, 이제 잘 풀리겠지.”
그러나 신앙은 결과를 보장하는 장치가 아니다.
신앙은 관계를 요구하는 자리이며,
그 관계는 언제나 삶의 방향을 먼저 묻는다.
하느님은 우리 편이 되어 달라고 불러낼 수 있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그분 편에 서 있는지를 물으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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