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독서 말씀] 먹지 못함과 기도의 생리학
제임스
2026-01-12 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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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공복은 어떻게 기도가 되는가 —
사무엘기 상권의 시작(1장 1-8절)에서 가장 눈에 띄는 문장은 의외로 단순하다.
“한나는 울기만 하고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이 짧은 문장에는 기적도, 예언도 없다. 그러나 식품을 연구해 온 사람의 눈에는 이 말이 유난히 크게 다가온다. 먹지 못함은 언제나 몸의 깊은 신호이기 때문이다.
“한나는 울기만 하고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이 짧은 문장에는 기적도, 예언도 없다. 그러나 식품을 연구해 온 사람의 눈에는 이 말이 유난히 크게 다가온다. 먹지 못함은 언제나 몸의 깊은 신호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먹지 못함을 신앙적 결단이나 금식의 결과로 이해한다. 그러나 한나의 공복은 결심의 산물이 아니다. 그녀는 의도적으로 단식한 것이 아니라, 먹을 수 없었던 상태에 놓여 있었다. 음식이 없어서가 아니라, 몸이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생리학적으로 볼 때, 강한 정서적 스트레스는 가장 먼저 식욕을 억제한다. 스트레스가 지속되면 교감신경이 활성화되고, 소화관의 연동운동은 줄어든다. 위장은 수축하고, 침 분비는 감소하며, 음식은 입안에 머무는 순간부터 불편함으로 바뀐다.
몸은 이렇게 말한다. 지금은 먹을 때가 아니다.
몸은 이렇게 말한다. 지금은 먹을 때가 아니다.
한나가 처한 상황은 단순한 슬픔이 아니다. 그녀는 매년 반복되는 제사의 식탁에서, 자신의 자리가 점점 축소되는 경험을 하고 있었다.
프닌나의 조롱은 말의 폭력이지만, 더 깊은 상처는 식탁에서 드러난다.
아이가 없는 여인은 몫이 줄어들고, 존재의 의미가 함께 줄어든다.
이 반복적 신호는 몸에 각인된다.
프닌나의 조롱은 말의 폭력이지만, 더 깊은 상처는 식탁에서 드러난다.
아이가 없는 여인은 몫이 줄어들고, 존재의 의미가 함께 줄어든다.
이 반복적 신호는 몸에 각인된다.
그래서 한나는 먹지 못한다.
그것은 신앙의 결단 이전에, 신체가 감당하지 못한 상황에 대한 반응이다.
그것은 신앙의 결단 이전에, 신체가 감당하지 못한 상황에 대한 반응이다.
흥미로운 점은, 먹지 못함이 반드시 약화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소화가 멈추면, 몸은 에너지를 다른 방향으로 재배치한다. 소화기관에 쓰이던 에너지가 줄어들면, 감각과 정서, 인식에 더 많은 자원이 배분된다. 실제로 공복 상태에서는 감각이 예민해지고, 내적 자각이 강화되는 경우가 많다.
이때 몸은 외부 세계보다 내부 신호에 더 귀를 기울이게 된다.
한나가 울기만 하고 먹지 못한 시간은,
단순한 침체의 시간이 아니라 감각이 안쪽으로 접히는 시간이었다.
말이 줄고, 행동이 멈추며, 몸은 점점 한 지점에 집중한다.
한나가 울기만 하고 먹지 못한 시간은,
단순한 침체의 시간이 아니라 감각이 안쪽으로 접히는 시간이었다.
말이 줄고, 행동이 멈추며, 몸은 점점 한 지점에 집중한다.
그 지점이 바로 기도의 자리다.
우리는 기도를 ‘무엇인가를 말하는 행위’로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 속 많은 기도는 말 이전의 상태에서 시작된다.
한나의 기도 역시 그렇다. 그녀는 처음부터 말을 잘하지 못한다.
입술만 움직일 뿐, 소리는 나오지 않는다.
이는 감정의 과잉 때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신체적 긴장과 억제의 결과이기도 하다.
그러나 성경 속 많은 기도는 말 이전의 상태에서 시작된다.
한나의 기도 역시 그렇다. 그녀는 처음부터 말을 잘하지 못한다.
입술만 움직일 뿐, 소리는 나오지 않는다.
이는 감정의 과잉 때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신체적 긴장과 억제의 결과이기도 하다.
먹지 못하는 것이 소화가 억제되고
신체 에너지의 재배치가 이루어지면
비로소 감각의 내향화가 이루어지는 과정이
기도를 가능하게 하는 몸의 준비 과정로 읽을 수 있다.
기도는 갑작스러운 결단이 아니라,
몸이 더 이상 다른 방식으로 반응할 수 없을 때 자연스럽게 열리는 통로다. 한나의 기도는 “먹지 못함”이라는 생리적 상태에서 발효되었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다.
몸이 더 이상 다른 방식으로 반응할 수 없을 때 자연스럽게 열리는 통로다. 한나의 기도는 “먹지 못함”이라는 생리적 상태에서 발효되었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다.
공복은 늘 불안정한 상태다. 그러나 신앙적인 면에서 공복은 열린 상태다.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은 상태, 그래서 무엇이든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다.
한나는 먹지 못함 속에서 하느님을 부른다. 흥미롭게도, 그녀의 기도는 곧바로 아이를 달라는 요구로 나아가지 않는다. 먼저 그녀는 자기 존재를 드러낸다.
“이 여종을 기억해 달라.”
이는 배고픔의 해결을 넘어, 존재의 회복을 청하는 기도다.
“이 여종을 기억해 달라.”
이는 배고픔의 해결을 넘어, 존재의 회복을 청하는 기도다.
몸이 먼저 비워지고, 그 빈자리에 말이 채워진다. 그러나 그 말은 계산된 문장이 아니라, 몸 전체가 토해내는 신호에 가깝다.
사무엘기의 역사는 한 여인의 공복에서 시작된다. 이는 우연이 아니다. 성경에서 새로운 전환은 종종 먹지 못함, 광야, 침묵 같은 상태에서 시작된다. 생리학적으로 보아도, 기존의 대사가 멈출 때 새로운 균형이 준비된다.
한나의 먹지 못함은 실패가 아니다. 그것은 이전 질서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는 몸의 선언이다. 그리고 그 선언 이후에, 새로운 생명이 잉태된다. 사무엘은 단지 한 아이가 아니라, 한 시대의 방향을 바꾸는 존재로 태어난다.
기도는 영혼만의 언어가 아니라, 몸이 하느님께 보내는 가장 솔직한 신호라는 사실을.
그리고 먹지 못함은 결핍이 아니라, 때로는 가장 깊은 준비라는 것을 생각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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