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성경 말씀] 한 말씀만 하소서 ― 백인대장의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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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집을 떠나 기숙사로 들어가던 첫날의 공기는 낯설고 차가웠다.
병이 나도 따뜻한 손 하나 건네줄 이 없는 공간.
그곳에서 감기 기운이 몰려오던 밤이면, 어둠 속에서 갑자기 신앙의 불꽃이 타오르곤 했다.
평소에는 잊고 살다가도 아플 때만 불현듯 주님을 찾던,
지금 돌아보면 참으로 인간적이면서도 어딘가 부끄러운 기도였다.
특히 시험을 앞둘 때 아픔이 찾아오면, 그 작은 통증이 세상을 전부 삼켜버릴 듯 두려웠다.
“주님, 이번만은 제발…”
그렇게 속삭이던 기도는 마치 외로운 방의 허공에 뜨는 작은 등불 같았다.
하인을 거느리고 사는 사람들도 비슷했을 것이다.
하인이 아프면 집안의 일상이 멈추고, 때로는 큰 손해가 따르는 법이다.
그러나 어떤 주인은 하인을 단순한 일손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함께 지탱하는 또 하나의 ‘사람’으로 여긴다.
종의 고통에 마음을 쓰고, 그 눈물에 자신의 그림자를 비추는 이들.
카파르나움에서 예수님을 찾아온 백인대장 역시 그러한 사람이었다.
그는 하인의 병을 바라보며 자신의 연약함과 무력함을 보았고,
그 아픔을 그대로 짊어진 채 예수님께로 걸어왔다.
“주님, 제 종이 중풍으로 누워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그는 유다인이 아니었고, 신앙 공동체의 울타리 밖에 있던 사람이다.
그러나 그의 태도는 누구보다 더 겸손했고 진실했다.
세상의 계급과 권위가 그의 어깨에 얹혀 있었지만,
예수님 앞에서는 그 모든 것을 벗어던지고
한 사람의 고요하고 절박한 인간으로 서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주저 없이 응답하셨다.
“내가 가서 고쳐 주마.”
그러나 백인대장은 오히려 그 초대를 정중히, 그러나 단호하게 사양한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 순간,
그의 말은 바람 한 줄기가 되어 예수님의 마음을 흔들었다.
‘한 말씀만.’
그 짧은 문장은
인간이 쌓아 올린 확신의 벽을 무너뜨리고
온전히 주님께 마음을 내어 맡기는 순결한 신뢰의 빛이었다.
그는 가까움보다 ‘말씀’의 힘을 더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주님이 발걸음을 옮기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이 움직이는 것을 믿었다.
군대 경험을 비유로 들며 그는 고백한다.
“저도 명령하면 가고 오나이다.”
저 먼 곳에서 내린 말 한마디가 사람을 움직이듯,
주님의 말씀은 눈에 보이지 않는 더 깊은 세계를 움직인다는
놀라운 믿음의 고백이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믿음 앞에 감탄하신다.
“이스라엘 안에서도 이만한 믿음을 본 일이 없다.”
혈통도, 신분도, 종교적 경계도
하느님 나라의 문을 여는 기준이 아님을
백인대장은 삶으로 증명했다.
그 문은 결국 겸손과 신뢰의 열쇠로 열리는 문이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종종 눈에 보이는 증거를 찾는다.
기적처럼 응답되면 감사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마음이 흔들리고 의심이 싹튼다.
그러나 백인대장의 믿음은 조건이 아니라 신뢰였고,
계산이 아니라 내어맡김이었다.
우리는 미사 때마다 그의 고백을 입가에 올린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
수없이 반복하지만,
과연 그 믿음의 무게를 온전히 지니고 있는가를 묻게 된다.
믿음은 기적을 얻기 위한 기술이 아니라,
자신을 주님께 맡기는 가장 깊은 용기이다.
그 용기를 지닌 이들에게
주님은 오늘도 조용히 말씀하신다.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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